2012/05/18 12:27

라세츠의 꽃 + 순정만화 몇 개. 메모

 &라세츠의 꽃
 - <유라라의 달> 후속작이죠? 유라라의 달은 개인적인 이유로 안 봤지만 라세츠는 제법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한 3권까지 정발됐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권까지 쭉 따라왔다.
 퇴마 귀신 악령 등등의 동양 판타지를 다룬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좀 유치한 감은 있다. 또 게다가 이건 본질적으로 고딩이 주인공인 순정만화니까 중간중간 나오는 연애 클리셰들 그런 거 당연히 살짝 유치하고 오그라들고. 라세츠에게 운명을 부여한 그 악령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너무 억지스럽고. 뭐 예쁘다고 사춘기까지 기다려서 잡아먹으러 오냐 그냥 어릴 때 잡아먹든 아니면 애초에 다 큰 여자 잡아먹든 하지.. 까지 쓰고 생각해 봤는데 이건 엘리자베스와 토드 얘긴데?
 그래도! 순정만화는 유치해야 제맛이니까 재밌게 읽었다. 내가 재밌게 본 순정만화 중에는 이거보다 백배 유치한 거 많다고. 9권으로 길이도 그닥 부담스럽지 않으니 이제 볼 거 없다 싶은 사람이 찾아보면 좋겠다. 추천. 참고로 내가 유라라의 달을 안 본 이유는 결국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주의 덧없는 짝사랑이었다.. 뭐 이런 결말 때문이었는데 라세츠는 결말도 깔끔하게 해피엔딩으로 나니 나처럼 해피엔딩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두 배로 추천. 무엇보다 그림체 깔끔해서 좋음.

 &사랑일까요?
 - 목록에서 랜덤 돌렸다 이 제목 뜬 거 보고 한참 의아했다. 내가 이런 걸 봤었나? 한국 건가? 제목이 뭐 이래? 그러다 번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 검색을 해봤고 결과는 역시나.. 내가 예전 만화리뷰 포스트에서 몇 번 언급했던 상업지 꿈나무 타치바나 유타카의 초기작이다. <우리 포치가 말하길> 그리고 <Honey>. 아마 둘 다 리뷰했었지. 그리고 두 번 다 같은 말을 했었다. 제 2의 신조 마유가 될 가능성이 충만한 상업지 작가라고.
 이 만화도 역시 비슷하다. 존나 병신같은 여자애 하나랑 얼핏 보면 정상인 같지만 사실 또라이인 남자 쌍둥이 두 명.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하여튼 상업지답게 남자애들 집착이 겁나 쩔었던 것 같고.. 끝까지 정상인 코스프레를 했던 쌍둥이 중 하나는 사실 제일로 미친놈이어서 여주인공 몰카 홈비디오 일기 개인기록 등등을 죄다 녹음 녹화 도청해서 지 방에다 숨겨놓고 있었고.. 이쯤 가면 범죄인 거 같은데 이상한 데서까지 배려심돋는 여주는 그걸 모두 이해해주고.. 그러다 둘이 사귀고.. 참 이 정도면 여자도 정신병자 아닌가? 진짜 보면서 이해 안 갔었는데 나중에 둘이 사귀는 거 보고 유유상종이구나 싶었다. 이왕 또라이끼리 만난 거 서로 사회에 풀어놓지 말고 백년해로하며 잘 살았으면 좋겠다.
 장편 세 개를 냈는데 그 여주인공 성격이 다 똑같으니 이쯤 되면 이건 작가 고유의 정신세계라고 불러야 한다. 신조 마유가 마침내 그녀만의 세계를 개척한 것처럼.. 그래도 계속 책 잘 팔아서 돈 잘 벌고 있는 거 같으니 <우리 포치가 말하길> 완결한 뒤에도 이 여자는 비슷한 작품을 계속 찍어내겠지. 얼핏 보면 내가 깐 거 같지만 나는 칭찬하고 있는 거다. 후속작 나오면 사줘야지. 근데 이건 내가 그냥 개그를 못 버려서 그러는 거고 절대 추천은 못하겠으니 읽지는 마시오... 지뢰임...

 &하트나라의 앨리스
 - 나 이거 게임으로 해봤지롱. 근데 플레이타임이 너무 길어서 좀 하다가 때려쳤던 거 같아.
 여성향 게임의 만화책 이식. 의 가장 성공적인 예는 아마 <금색의 코르다> 가 아닐까 생각한다. 안젤리크는 절판됐고 <머나먼 시공 속에서>도 완결나긴 했지만 하루카1은 너무 오래됐잖아. 뭐 이건 코에이가 워낙 미디어믹스 전문이니까 그렇다 치고, 그런 타 시도들에 비해서 영 성의가 없었다는 느낌. 게임을 너무 그대로 이식하려다 보니 스토리가 지루해지고 캐릭터당 지분을 공평하게 분배하려다 보니 컷과 에피소드가 산만해진다. 안 그래도 캐릭터 많은데 인기 없는 몇은 좀 죽이고 톱쓰리를 살리는 식으로 가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모자장수하고 정신병자 토끼 인기 존나 많았잖아. 핫핑크 고양이는 쩌리였고. 만화 결말에서는 모자장수랑 어설프게 이어지는데 차라리 이렇게 이어줄 거였으면 처음부터 메인캐릭터로 삼든지 내용이 너무 지지부진하다. 6권 완결인데도 한 권 한 권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끝까지 읽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 코에이를 좀 본받으시오. 캐릭터 상품 내고 게임 내고 하는 거 보면 사람들이 멍청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돈 버는 법을 몰라요. 거기 옆동네 루비파티는 일구구오 년에 만든 열한 명 수호성으로 몇 년을 해먹고 있는지 보라고.

 &너와 나
 - 홋타 키이치 작품.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난다. 탈력계 청춘 그래피티라는 카피로 광고하고 있는데 탈력, 이라는 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 내가 이거 10권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에 물 건너에서는 이거 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며?
 정말 일상. 별 거 없는 고등학생들 얘기를 참 맛깔나게 잘 그려낸다. 실제로 남녀공학이 저런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여고를 나왔고 저렇게 예쁜 학창시절을 보내지도 않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같은 학교 진학한 동네 소꿉친구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학창시절 보냈으면 참 행복했을 거 같다. 이런 친구들 있었으면 또 더 행복했을 거 같고. 사실은 제일 어린 까칠한 애늙은이 카나메도 민폐덩어리 유키도 어른스러운 유타도 혼혈아인 치즈루도 다 귀엽다. 물론 내 성격에 유키 같은 친구 있었으면 절대 저 민폐 안 받아주고 툭툭 싸가지 없게 굴었겠지만.. 난 민폐쟁이들 시름... 그래도 이게 다 판타지잖아. 나처럼 심심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을 위한 판타지. 세상에 저런 고등학교도 고등학생도 없다는 거 알지만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
 일본에서 만든 건데도 일본 냄새 그렇게 많이 안 나서 좋고. 보다 보면 행복해져서 좋고. 얘네 대학 갈 때까지 계속 그려줄 거라는데 나중에 정말 치즈루랑 메리랑 이어져서 결혼할 때까지도 계속 그려줬으면 좋겠다. 이 캐릭터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딱히 뚜렷한 스토리라는 게 없기에 다음 권 기다리는 것도 별로 힘들지 않다.
 여하간에 추천. 제목도 귀엽지요? 처음 1~2권 그림체는 뭐랄까 좀 덜 다듬어진 느낌이 있었는데 가면서 선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애들 얼굴도 빵빵해지고 그래서 그림 보는 재미가 있어요.

 &두근두근 고교 왕자반
 - 아 제목 좋다. 난 이렇게 유치하고 오그라드는 거 좋더라. <러브 콤플렉스> 작가의 단편인데 이름이 아마 나카하라 아야였던 거 같고. 자뻑 왕자 공부 왕자 뭐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저마다 왕자 포지션을 맡고 있는 애들이 연애하는 얘긴데 실제로 없을 얘기라서 더 귀여워. 재밌어. 별 생각 없이 깔깔거리면서 보기 딱 좋고 단편이라 부담도 없다. 유치하고 귀여운 거 좋아하면 왕추천. 러브콤 재밌게 봤으면 이것도 재밌게 볼 수 있음.
 동작가의 <하나다>도 시도해봤는데 그건 너무 내 취향 아니라서 중간에 덮었어여.. 재미 좆나게 없어.... 먼가 여자애 짜증나서..
 그래도 후속작인 <나나코로빈> 은 재밌게 봤어요. 이거 내가 리뷰 했었나? 했었지? 하고 찾아보니까 안 했었네. 다음에 랜덤 걸리면 나나코로빈 얘기 하면서 썰을 더 풀어 보겠어요 나 그것도 짱 재밌게 봤음

 &모델
 - 작가 이름이 기억 안 나서 뒤져봤다. 이시영은 아닌데? 하고 찾아보니까 이소영. 좀 예전에 본 거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재미 더럽게 없었다는 거랑 스토리에 개연성 하나도 없었다는 거 그리고 그림체 내 취향 아니었다는 거 이 정도가 떠오르네. 비추천. 보고 한국 만화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는 만화임.
 아마 뱀파이어 얘기였던 거 같은데 얘네 둘이서 왜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지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왜 스토리가 그리로 가는지 정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이해가 안 갔었어. 짜증나서 덮고 싶었는데 그래도 완결까지는 봐야겠다 하고 휙휙 읽다가 나중에 짜증나서 집어던졌던 기억도 남. 이거 말고 작가 다른 작품은 읽어본 적 없는데 아마 작품들 중에서 이게 제일 유명할 듯. 여하튼 비추천.

 &빠삐용 꽃과 나비
 - <피치걸> 후속작이죠? 피치걸 보면서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나 하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이건 재미까지 없어서 보는 내내 화 좀 났었다. 피치걸은 짜증은 좀 나도 재미는 있었다고. 결국 내가 얘랑 이어졌으면, 하는 애랑 되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썅년이었던 여자애는 알고 보니 그래도 속 여린 여자애였고. 그래서 피치걸 리버스에서 결국 새로운 사랑을 쟁취하고 등등.
 그런데 이건 순정만화인데도 순정만화 같지가 않다. 나오는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매력이 없어. 본래 생각한 스토리에 심리학 관련 개념들을 좀 어떻게 잘 엮어 보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 개념들이 스토리 위로 그저 겉돌 뿐이다. 즉 깊이가 없다. 재미도 없고.
 후속작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보고 작가한테 좀 실망했다. 차라리 피치걸 리버스나 한 권 더 그리지 싶었다. 재미없음. 비추천. 재미없어서 스토리도 쓰기 싫음.



 만화 리뷰하고 싶어서 손이 막 덜덜 떨렸어요 와 정말 오랜만이야...
 신간 안.. 아니 못 챙겨본 지 꽤 됐지만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또 밀린 것들 리뷰하겠습니다. 참고로 내가 가장 최근에 산 만화책은 오늘부터 신령님 10권인데 졸라 재밌었습니다. 11권 빨리 정발되고 유키지 떡밥 정리하고 토모에랑 여주랑 둘이 좀 잘 됐으면 좋겠슴니다. 그럼 안뇽~~ 오랜만에 만화밸리에 글 보내게 되어서 기분이 조아요~~~

2012/05/17 18:40

mitte des lebens 메모

 월요일 새벽 진통제 세 알을 먹고 우리 집 화장실 수건걸이에서 천천히 죽어갈 예정이었던 나는
 살아 있다.
 시도는? 실패했다. 죽음 문턱까지 갔었던 그 잠깐(초 단위인지 분 단위인지 나는 아직까지 그걸 가늠할 수가 없다)의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끔찍한 경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잠깐이나마 죽음을 본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길로의 고통이 두렵지 않다.
 그 시간이 지나가고 오래도록 생각을 해봤다. 화장실 문 걸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서 한 서너 시간을 그렇게.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문자답이 흘렀다. 다시 해야 되나? 하는 일차원적인 사고부터 시작해서 이건 도피인지 도피가 아닌지. 내가 지금 새로 하려는 선택은 과연 얼마나 멍청한 것일지. 내가 만약 여기서 재시도해 죽지 않는다면 며칠에 걸쳐 나를 보내 준 사람들을 오히려 엿먹이는 건 아닌지. 그리고 또 아랫배를 쿡 찌르며 떠오르는 J 그 녀석의 얼굴. 관념. 나는 너를 어떻게 보냈었나. 내가 널 보내고 그토록 골머리를 앓았던 건 어쩌면 상실감과 함께 따라오는 그 박탈감. 나 스스로 널 보낼 마땅할 권리를 내게 주지 않았다는 그 사실 때문이 아니었었나. 그래서 그 생각들이 몇 번 더 돌고 또 마지막에 드는 일차원적인 질문이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그리고 침묵.

 다음 날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날 보낼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는 우리 엄마, 우리 언니, 내 가족들한테 가장 먼저 주어졌어야 했다. 애정 혈연 그런 걸 떠나서 내가 없어지면 가장 큰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나는 아이러니하게 내 친구 지인 등등에게는 공평하려 애썼으면서 정작 가족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어했다. 왜냐. 지키고 싶어서. 우리 엄마는 내가 죽는다면 그대로 따라 죽을 사람이고 언니한테는 아직 엄마가 필요하니까. 내가 아무리 그렇다 말해도 끝까지 날 보낼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애초에 나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체를 먼저 발견하지 못하도록 열쇠도 들고 들어가 문을 단단히 걸어잠갔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가족들을 위해서. 내 병은 지지난 주 처음 입원하고 확진받은 다음날부터 갑자기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입원기간 동안 염증수치가 급격히 올라갔고 고통은 배로 심해져 마지막에는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고통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정말이지 끔찍했지만 나는 제발 하루만 집에 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이유는. 결심을 한 것은 오래 전이고 죽는다면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데이를 월요일 새벽으로 잡은 것은 그래서였다. 월요일에는 다시 입원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실패하고 오랜 생각을 한 이후 권리에 대한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에도 몇 시간 골머리를 앓은 다음

 나는 진통제를 갖다 버렸다.
 갖다 버린 건 아니다. 숨겼다. 내가 정말 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평온을 찾고자 한다면 나는 최소한 고통이 뭔지는 알아야 했다. 그 본질을 제대로 직시한 다음에 피하든 맞서든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진짜 멍청하고 충동적이고 병신 같은 결정이긴 했는데 그냥 뭐랄까. 나는 겁쟁이가 되기는 싫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겁쟁이가 아닌 것은 또 아니고 용감한 사람인 건 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고통이 뭔지도 제대로 모른 채 그게 무섭다고 도망치기는 싫었다.
 일 주일을 리미트로 잡았다. 진통제 없이 일 주일을 버틸 수 있다면 한 달도. 또 일 년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일 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진통제를 먹는다면 나는 역시 살 권리, 권리라고 하니까 좀 그런데 다른 대체어가 없다. 어쨌든 그게 없는 것이니 그 때는 확실히 죽겠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지. 위에도 썼듯 나는 그 경험 이후로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그 일 주일은 가족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나는 구토를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지? 나는 음식 냄새, 아니 꼭 반찬 냄새만이 아니라 밥 할 때 나는 그 구수한 냄새만 맡아도 울컥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화장실에 들락거려야 했고 종종 병실에 비치된 구토판에다가도 그 조금 먹은 걸 다 뱉어내야 했다. 하루에 먹은 음식이 방울토마토 세 알이 끝인 적도 있었다. 위에 들어간 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도 항상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나를 아프게 하는 음식이라는 것이 너무 끔찍했고 그 냄새. 그 형상. 하여튼 내 몸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거부반응이 있었다.
 먹질 못하니 당연히 모든 것이 더 빠르게 나빠졌다. 이 얘기 썼던 거 같은데 혈액검사 결과 혈액수치가 7.4까지 떨어졌었다. (정상은 12~15) 앞자리가 6이 되면 신장이 (더) 망가지기 시작해 투석을 받아야 할 거라고 수혈을 하라 마라 의사들이 말이 많았었다. 끝까지 수혈은 받지 않았지만 아마 그 즈음 내 몸의 컨디션은 바닥을 쳤었을 것이다. 영양수치도 바닥을 기었고 급성염증지표 염증지표 등등은 하늘을 찔렀다. 뭐였더라? 포타슘 수치도 낮아서 나보고 수박을 많이 먹으라고도 했던 거 같다. 물론 먹지 못했지만. 
 그런데 그 맘을 먹고 다시 입원하자마자 신기하게 식욕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밥을 다시 먹을 수 있었다. 한 끼에 두세 숟갈 정도 꼬박꼬박. 헛구역질은 계속 났지만 먹어도 토하지 않았고 음식 냄새, 아니 그냥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올라오던 것이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까지 하나둘씩 생겼다. 옥수수. 문어 모양으로 볶은 비엔나 소시지. 오이겉절이. 볶음김치. 대하 소금구이. 닭꼬치. 돼지갈비.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씩 생각날 때마다 이상하게 힘이 났다. 진짜 유치하고 웃기기는 한데 내가 옛날부터 먹을 걸 하도 좋아했다 보니까. 내일은 이거 먹어 봐야지 하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 수 있었다. 첫날에 두세 숟갈을 먹었다면 다음날은 서너 숟갈. 그러다 저녁은 반 공기까지 먹을 수 있었고 어느 날은 밖으로 빠져나가 외식도 했다. 돼지갈비. 먹고 찌개에다 밥 반공기나 또 먹었다.

 그와 동시에 고통이 줄었다.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랫배가 콕콕 쑤신다. 하지만 하루에 고통이 급격히 밀려오는 어느 지점, 몇 번의 순간을 눈 딱 감고 참아내면 그 외의 시간은 그냥 이 딱 물고 참을 만큼만 아프게 되었다. 이제는 진통제가 필요없다. 마약성 진통제는 커녕 중독성 없는 일반 진통제도 처방받지 않았다. 나는 내 고통을 이제 조절할 수 있다.
 다시 혈액검사를 했다. 사실 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낀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다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잖아? 그런데 결과도 꽤 괜찮게 나왔다. 혈액수치가 9.8까지 올라갔고 영양수치도 정상 범위는 아니지만 하나 이상이 올라갔다. 급성염증지표도 80을 찌르던 것이 13까지 떨어졌다. 염증지표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검사할 때마다 2~3씩 꾸준히 내려가 주고 있었다. 세상에 그 숫자가 뭐라고 나는 의사가 보여주는 그 쪽지 하나 보고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내가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그냥 이 모든 게 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뻤다.

 짧게 쓰고 싶었는데 너무 길게 썼다. 뭐 요 며칠 나를 스쳐지나갔던 것들을 낱낱이 쓰자면 대하소설을 하나 써놔도 부족하겠지만.
 의사는 나를 하루 일찍 퇴원시켜 주었다. 원래는 다음 주까지 입원해 있어야 되는데 미국으로 학회를 가야 한다나 뭐래나 그래서 금요일 오전 퇴원, 이렇게 됐었는데 수치가 괜찮으니 하루 일찍 가셔도 되겠다고 목요일 오전으로 땡겼다. 그러니까 오늘 말이야.

 아직 몸이 다 괜찮아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괴롭히고 화장실도 하루에 열 번 이상은 간다. 헛구역질은 사라지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여전히 아프다. 밥도 아직은 가장 많이 먹는 것이 반 공기. 저녁에만 반 공기를 먹고 아침 점심은 딱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완전한 관해기에 들어가려면 3개월에서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약제반응이 안 좋으면 일 년 이상, 혹은 평생 나아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운 좋게 관해기에 일찍 들어선다 해도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른다 했다. 환자의 90퍼센트 이상이 재발하고 반수 이상이 악화기를 반복하여 결국은 장기를 잘라내게 된다고. 재발과 악화라는 말은 너무 무섭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니까. 어느 순간 또 입원하게 될지 모르고 음식이 싫어질지 모르지. 또 주사바늘과 반복되는 검사 검사 검사 그리고 싫은 음식 냄새 구토 복통 설사 기타등등. 다른 장기에 전이되면? 그럼 몇 배로 일이 힘들어진다. 모든 장기에 전이될 수 있는 병이기에 나는 항상 내 몸의 이상을 예민하게 체크해야 한다. 심지어 안구에까지도 침범을 한다고. 어느 날 눈이 시릴지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나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필요없다. 타인의 빠른 호전 기록이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악화에 같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언젠가 다시 재발이야 하겠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평생 재발이 없다고 하기도 하니까. 또 재발하면 그건 그 때 생각할 문제인 거고 지금 당장은 관해기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죽기를 결심하고 주변을 정리했던 그 며칠간 나는 한 시간 한 시간을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에 그 일 분 일 초가 나한테는 보물이었다. 내일. 내일모레. 그러나 글피는 없다는 걸 알기에 그 이상의 시간을 생각할 필요도, 여력도 없었다. 매 시간 최대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집중했다.

 그 순간을 잊지 않는다. 못한다고 해야 맞다. 내가 죽음에 점차 직면하기 시작했던 그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그 앞까지 잠시 갔다왔던 잠깐의 순간. 압박붕대로 만든 올가미. 내가 몇 번이고 말했던 것처럼 그것들을 혹시나 잊되 절대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성장하게 한 그 경험들. 내가 조약돌 속에서 또다시 찾아낸 한 줌의 찬란한 보석.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오늘을 보면서 살 것이다. 그 순간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일 분 일 초. 나를 흐르는 시간에 매 순간 예민하게 신경을 돋우면서. 내일 내가 아플지 몰라도 그건 그 다음의 일이니 오늘 당장은 내 삶에 집중해야 하겠다. 나는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또 하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 때 죽기로 결정했던 것은 내 삶에서 가장 이성적인 결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버텨나갈 길을 찾아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이 그립다. 이 모든 기억을 갖고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아프지 않았을 때. 별로 길지 않았던 삶 중 가장 충만했던 순간에도 나는 항상 골목길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죽음을 보았다.

 뱃사람을 유혹하는 세이렌 소리. 그리고 너무나도 찬란한 한 줄기의 빛. 사람은 평생 중 한 번은 그 찬란한 빛을 본다고 해.
 그리고 그 빛에 끌려 발을 떼는 순간. 내 주위를 빙빙 돌며 그 잔상만을 남기는 파랑새 한 마리를 보는 순간. 그 길게 늘어진 꼬리에 손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우리는.

 언제 내가 다시 죽고 싶어질지는 모르겠다. 는 거짓말이다. 지금도 살기보다는 죽고 싶다.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한 것인지 아니까. 그건 정말 치열한 저울질이었다. 내가 살면서 앞으로 얻을 기쁨 환희 전율 인연 의미 사랑 기타등등의 goodness는 내가 죽음으로써 얻을 평온보다 무거울까? 아니. 후자보다 괜찮은 건 없다. 죽음보다 나은 삶은 없다. 영원히 없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조가비들이 너무나 많다. 조약돌 조가비 그리고 가끔 반짝이는 보석들. 평생을 통해 주워모은 그것들을 나는 아직 다 꿰어내지 못했다. 목걸이든 팔찌든 머리장식이든 나는 그것들을 내 밖으로 꿰어내 풀어 줄 의무가 있다. 나를 이루는 파편들. 예술. 나를 살게 하고 동시에 나를 죽지 못하게 한 그 아름다운 언어들 말이야.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항상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보다 예민하고 뾰죽뾰죽 까칠하고 또 감정적인 극단성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좋고 싫은 것이 많기는 했다. 내 속에 하루하루 늘어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걸 주체하지 못해 가끔 일기를 썼을 뿐 나는 아직까지 좋은 것을 하나도 쓰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글 쓰는 사람도 아니지. 미대생이란 말이야.
 그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것도 모르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사실 나는 자기애가 강하긴 해도 나 스스로의 한계는 잘 인식하고 있다. 하루에도 백 번씩 나를 의심한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냥 그런 애가 아닐까? 혹은 좀 멍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래도 내가 글을 아주 못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정도가 아닐까? 정말 교육받은 사람들은 나보다 이백 삼백 배는 더 잘 쓸 것 같고 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대학생. 기타등등. 그림에 대해서도. 재능 문제야 이야기하기 싫으니까 그렇다 치고 나한테 그럴 만한 감성이라는 게 있나. 나는 이런 걸 하기에는 너무 메마른 것 같아. 사실 나는 그냥 겸허하게 공부나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기타등등. 그러다 보면 조금씩 자기혐오가 오게 되고 내가 들었던 칭찬들을 한 번씩 의심하는 거야. 뭐가 돼도 될 거라니 그럼 노숙자가 되어도 된다는 말이잖아 이런 식으로.

 그래도.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나는 내 조가비들을 악착같이 하나씩 꿰어낼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잘, 정말 잘 만들어 누구든 아주 괜찮은 목걸이 또는 팔찌라고 말할 수 있는 결과물을 뱉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게 되고
 내 안에 있는 조가비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찬란한 보석들이 점점 빛이 바래어 이제는 꿰어낼 것이 없는 그 순간에

 나는 그 비로소 한 줄기의 빛을 따라갈 것이다.
 파랑새의 꼬리를. 잡을 것이다.




 까지는 별 의미 없는 나의 회고록 비슷한 일기였고 (접는 글 처음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관둠)
 유서는 지우지 않겠습니다. 이글루스 모바일이 병신인지 수정버튼 두 번 눌렀다고 갑자기 올린 날짜가 1970년도가 되고 글 반쪽이 통째로 날아가고 등등 사고가 좀 있기는 했지만 그 글에 비공개로 달린 리플들. 어쩌면 오늘까지 나를 살아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인 그 글들은 평생 담아 두고 잊지, 아니 잃지 않을 거예요.
 이번 주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 리플들을 처음부터 다시 다 천천히 읽었습니다. 나를 보내 주려고 노력한 분들에게 다시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 해서 그 노력과 그 글들이 결코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미안하다는 말은 안 쓰려고 했는데 너무 미안해서 꼭 써야 하겠습니다. 음 미안하다고 말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안겨줄 뻔했던 그 상실감에 대해 미안하고. 준비를 해야 했던 그 순간들에 미안하고. 아마 같은 말을 내 친구들에게도 백 번 이상을 해야 하겠지만 기타 다른 박탈감 등등 마이너스 감정에 대해서도 나는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일도 나는 살아 있을 예정이기에 이제부터는 감사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주셨던 그 수많은 것에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도 계속.

 유서는 언젠가 비공개로 돌릴 예정입니다. 글이 반쪽 날아가서 이제 더 읽을 수 없기도 하고 이제 남 보여주기 좋은 글도 아니니까. 하지만 결코 지우지는 않을 것이고 언젠가, 정말 언젠가 내가 위에 썼던 것처럼 그 한 줌의 빛을 손에 쥘 날이 다시 오면
 그 때 다시 공개로 돌리고 새로운 글을 붙이려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려 합니다. 이 블로그에는 앞으로도 별 영양가 없는 글들이 계속 올라올 것입니다.
 나는 위에 적은 그 경험들 이후로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자기애는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해 계속 얘기하게 합니다.
 다시 한 번 많이 고맙고 미안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안녕!

2012/05/06 18:17

창 밖을 계속 바라보다가. 메모

먹고 싶은 것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보고 싶은 것이 없고 읽고 싶은 것이 없으며 듣고 싶은 것이 없다
삶의 모든 의욕을 거세당했다
약 부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고통의 감내 단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무 알 정도의 약을 먹는다.
아침에 먹는 것이 그 정도고 점심은 반으로 줄고 저녁은 그보다 좀 더 많은 약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진통제와 자기 전에 먹는 항우울제
왜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나 했는데 알고 보니 소량으로 복용하면 신경안정제 및 수면유도제로 더 잘 쓰이는 약이라고.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몇 번 호소했더니 추가해 준 모양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음식 냄새가 역겹다
하지만 약이 독해 꼭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고 먹어야하므로 매 끼를 꾸역꾸역 조금씩 먹는다
보통은 서너 숟갈 많이 먹을 때는 반 공기 좀 안 되게
끔찍해도 계속 억지로 밀어넣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링거로 투여하는 그 거대한 하얀 우유같은 아미노산제를 더 맞기 싫기도 했고(의사는 내가 밥을 잘 먹기 시작한다면 투여를 중단해 줄 것이라고 여러 번에 걸쳐서 말했다)
또 수혈받기 싫으니까.

몸에 피가 정상인의 2/3정도밖에 없다고
다른 의사가 며칠에 걸쳐 계속 수혈을 권유했다
12~15사이여야 하는 것이 입원할 당시에는 8.6
그리고 지금은 7.4까지 떨어졌다고
앞자리가 6으로 떨어지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니까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데
나는 월요일에 수치를 다시 확인하고 결정하겠다고 계속 수혈받는 것을 미뤘다.
내일 재 보면 더 올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면서
아 그냥 나는 그 주사바늘들이 너무 싫을 뿐인데

결국 이 모든 것이 지나가겠지만
나는 이 순간을 사는 사람이기에
나는 절대 여기에 무감각해질 수 없다.


많은 것을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약에 쓸려가 사라져 버리고
그 찌꺼기들만이 남아 나를 의아하게 해
나는 어떤 경로로 이런 생각을 했었었나
왜 나는? 그런 것들
생각의 실마리를 타고 조금씩 거슬러 오르다 보면
문득 깨닫는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벌써 많은 나를 잃었구나,

좋아했던 것들을 대부분 잃었기 때문에
싫어했던 것들마저 잃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는 건 내 악과 분노이다
소음과 분노로만 가득한 멍청이라니.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계속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도
내 궤도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고통도 상처도 모두 나의 것이며
나는 나를 의탁하지 않기 위해 그 모두를 기억해야만한다

모두 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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